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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12 10:59 수정 : 2018.04.12 11:38

[ESC] 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이 집 백숙은 이상하게 맛있어요. 닭 자체의 맛이 다른 걸까요?”라는 말씀에 나는 씩 웃고 답했어요. “그럴 수 있죠. 보통 우리가 먹는 닭은 태어난 지 30일께 도축된 병아리예요. 껍데기의 기름 맛으로 먹는 셈이죠. 그런데 보름만 더 살아도 닭은 살이 쫄깃해져요. 살코기만 먹어도 맛있죠. 시골 시장에서 먹는 닭이 맛있다는 것은 이런 원리예요.”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는 듯 쳐다보는 일행의 눈빛에 우쭐했습니다만, 사실 나도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에요. 어느 날 밤늦게 처음 보는 치킨집에 들어갔다가 세 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사장님의 자부심에 놀랐고, 살코기가 너무 맛있어 놀랐어요. (그리고 비싸서 놀랐습니다.) 테이블마다 ‘우리 가게 닭고기 맛의 비밀’이라는 홍보물이 놓여 있었어요. 그때 읽은 내용을 기억해두었다가 잘난 체하며 써먹은 겁니다.

요컨대 닭 맛의 비밀은 보름이라도 더 살렸다 잡는 것. 그래야 쫄깃한 맛을 내는 이노신산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1.5㎏밖에 안 나가는 어린 닭을 도축하지요. 영계백숙이나 동네에서 흔히 먹는 치킨이 살코기 맛이 그저 그런 까닭입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 큰 닭이 작은 닭보다 맛있다는 것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면, 왜 닭을 오래 살려두지 않을까요? 짐작하시다시피 돈 때문입니다. 달포가 넘어간 닭은 햇병아리보다 사료 값도 들고 공간도 차지합니다. 심지어 죽기도 잘 죽는다고 하네요. 좁은 곳에 가둬 키운 닭이다 보니 건강하지 않아 돌연사를 많이 한대요.

닭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쉬운 일. 우리는 거대한 닭고기 산업 때문에 맛있는 닭을 먹을 기회를 잃어버린 겁니다. 시장 논리가 우리 입맛을 빼앗은 셈. 닭고기의 영양도 줄었습니다. 2㎏이 넘는 대형 닭고기가 1.5㎏짜리 일반 닭고기보다, 풀어 키운 닭이 케이지에 가둬 키운 닭보다 영양가가 높다고 하니까요.

그렇다고 어디 가서 하소연할 상황도 아닌 것 같아요. 닭 먹는 사람보다 닭 키우는 사람의 처지가 딱하거든요. 오늘날 양계 농민 대부분은 육계 회사와 계약을 맺어요. 말이 좋아 계약이지, 실제로는 외주받는 노동자 처지라지요. 2015년 5월 기준으로 마리당 400원을 받고 닭을 회사에 넘기는데, 이나마도 ‘상대평가’라는 명목으로 종종 값을 깎는대요. 나도 잘 몰랐는데 <대한민국 치킨전>이라는 책을 읽고 알게 되었어요.

물론 잡아먹히는 닭이 제일 딱하죠. 태어난 지 달포 만에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치킨을 먹을 때마다 영 불편합니다. 그렇다고 보름을 더 살린다고 닭이 행복하겠습니까. 닭은 생각보다 오래 사는 동물. 자연 수명은 길면 십수년, 짧아도 7년이 넘는대요. 30여일 만에 잡는 것과 보름을 더 살려두는 일, 어느 쪽이 더 잔인한지 저는 모르겠어요. 살아 있는 동안도 즐겁지 않을 겁니다. 좁은 케이지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한 채 면역력도 떨어져 잔병치레를 하다가 도축당하니까요.

아무튼 백숙 먹던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잘 먹고 잘난 척하고 일어나다가 우리 일행의 눈은 가게의 반대쪽 벽에 멈추었습니다. 내가 떠든 이야기와 똑같은 내용이 이미 거기 붙어 있더군요. 무척 머쓱했지만, 방금 먹은 백숙의 쫄깃한 맛을 떠올리며 ‘그럼 그렇지’라는 듯 쳐다보는 일행의 시선을 이겨냈습니다.

김태권(먹기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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