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⑨ 골수 ‘공산당 마을’ 반후아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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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에서 골수 공산당 마을로 이름난 반후아이쿠 전경. 마주 오는 자동차를 피해 가야할 만큼 좁고 가파르게 이어진 산길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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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에서 사라진 마을 ‘반촘푸’
몽족 마을과 타이 마을로 나누어져
타이 정부, 몽족을 “빨갱이”라 공격
주민들, 공산당 무장투쟁의 길 선택
반후아이쿠에서 만난 왓꾸아 셀리
타이공산당 역사의 전설적 인물
가족과 친척 등 100여 명 전선으로
“게릴라 무장투쟁은 내 명예다”
역사를 따라 가려다 보니 길이 꼬였다. 국민당 잔당 마을 파땅에서 다음 목적지로 잡은 반촘푸까지 직선거리 22킬로미터를 놓고 애태운다. 축척지도에다 위성지도까지 훑었지만 마땅한 길이 안 잡힌다. “그 산길은 안 돼! 돌아서 가는 게 길도 좋고 시간도 줄이고.” 그나마 찾아낸 지름길 50킬로미터를 놓고 동네 사람 예닐곱 모두가 고개를 젓는다. 거친 이 동네 역사만큼이나 길도 만만찮다. 투덜투덜 북으로 47킬로미터 떨어진 치앙콩까지 올라간 뒤, 다시 국도 1020을 따라 남쪽으로 45킬로미터를 내려와 도이몬후아이참 산자락에 붙은 반촘푸로 들어선다. 이내 분홍 칠한 중학교가 거령스레 다가온다. 분홍빛을 뜻하는 마을 이름 ‘촘푸’를 드러내고 싶었던 모양인데, 쓸데없는 꾸밈 같아 눈에 거슬린다. 없는 길을 탓하며 멀리 돌아온 내 마음에 모가 난 듯싶다. “커피 한잔 하고 가세.” “이 동네는 없고, 10킬로미터쯤 되돌아가야 하는데? 두 시간 전에 마셔놓고, 또?” 일쩝은 듯 물음표가 많은 운전기사를 다독여 커피 한잔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 반촘푸로 되돌아온다.
‘빨갱이 메오 폭동’의 출발지, 반촘푸
반촘푸는 타이 현대사에서 사라져버린 마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반쪽만 남은 마을이다. 역사의 금역이 된 이 마을을 아는 이들마저 드물다. 본디 반촘푸는 국도 1020을 끼고 동쪽 도이몬후아이 산 속에 소수민족 몽(Hmong) 마을과 서쪽 평지 쪽 타이 마을로 나눠져 있었다. 지금은 몽 마을 자취를 찾을 수 없고 국도 앞 타이 마을만 남아있다. 그 사연은 이렇다. 1965년 타이 동북부에 이어, 1967년부터 치앙라이주와 난주를 비롯한 북부에서도 빈곤과 불평등 문제로 반정부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타이 정부는 애초 그 반정부운동을 중국이 설계한 공산주의 폭동이라며 군대로 밀어 붙였다. 타이공산당(CPT) 중앙위원회가 1960년 마오식 혁명을 내걸긴 했지만 그즈음 타이 북부지역을 통틀어 게릴라 수는 기껏 150여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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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서 이름 날린 왓꾸아 셀리.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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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꾸아 셀리의 타이공산당 무장투쟁 시절 모습.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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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가 지원하는 폭동은 현재 타이 정부의 안정을 해치거나 단기간에 넓은 해방구를 지닐 만큼 위협적이지도 않다. 게릴라 수가 작은 데다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1966년 5월에 만든 ‘타이 공산주의자 폭동’이란 비밀 문건(1991년 해제)은 그 시절 타이 정부가 무력 강공책을 펼 까닭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근데 여기서 반촘푸가 등장한다. 1967년 5월8일 오전, 반촘푸의 몽족 마을에서 화전 연기가 피어오르자 공무원이 찾아와 불법이라며 돈을 뜯어간데 이어 점심나절 또 다른 공무원이 찾아와 돈을 뜯어갔다. 오후 들어 이번에는 경찰이 들이닥쳐 또 돈을 요구하자 마을 주민들이 대들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하루 뒤인 5월9일, 무장 경찰 60여명이 몰려와 마을을 불태우고 짐승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렇게 해서 반촘푸의 몽족 마을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흩어졌다. 타이 정부가 몽족을 ‘빨갱이’라며 최초로 공격한 마을이 바로 반촘푸였다. 그로부터 타이 정부는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무장 강공책으로 몽족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기댈 곳 없는 몽족 사람들이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뛰어들면서 분쟁 강도가 점점 높아졌다. 그 결과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타이공산당 게릴라 수는 치앙라이주에서 600~700명으로, 난주에서 700~8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게 타이 현대사의 비극인 이른바 ‘꺼봇 메오 댕’이다. 우리말로 ‘빨갱이 메오 폭동’쯤 될 법한데, 메오란 건 타이 사람들이 몽족을 낮잡아 일컫는 말이다. 그 출발지가 반촘푸였다.
타이 쪽 사료가 없는 데다, 반촘푸의 몽족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려 이제 그날의 자취를 찾기는 힘든 실정이다. 게다가 5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보니 반촘푸의 타이 쪽 마을에서도 증언자를 찾아내는 일이 만만찮았다. 물어물어 옛날 촌장 춘 깐타끼오를 만났다. 그이는 아흔셋 인데 날짜까지 찍을 만큼 또렷한 기억력을 지녔다. “그날 헬리콥터 소리가 하루 종일 귀를 때렸고, 여기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군인들이 진 쳤지. 저 건너편 도이산똔빠오 산 속 반산똔빠오 마을이었어. 거긴 이제 남은 것도 없고, 그 산길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거야.” 춘 말은 두 가지 논쟁거리를 던져놓았다. 하나는 공격당한 몽족 마을 이름이 반촘푸가 아닌 반산똔빠오라는 전혀 알려진 바 없는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일부에서 말해온 군 동원 논란에 대한 증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마을에서 앞으로 풀어야할 중대한 숙제를 떠안고 보니 심사가 복잡해졌다. 역사에서만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반촘푸는 와서 보니 자취마저 찾을 수 없다. 떠나야할 발길이 한 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 반파땅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반후아이쿠 마을을 찾아간다. 반파땅에서 서남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이 산길은 비록 포장도로지만 마주 오는 자동차를 피해 가야할 만큼 좁고 가파르게 이어진다. 라오스국경에서 6킬로미터쯤 떨어진 반후아이쿠는 타이에서 가장 깊은 산골 마을이 아닌가 싶다. 반후아이쿠 들머리에서부터 수상쩍게 쳐다보는 사람들 눈길과 마주친다.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피한다. 관광객은 말할 것도 없고 바깥세상 사람들이 들락거리지 않는 마을이란 뜻이다.
“예나 이제나 세상이 안 바뀌었으니까”
이 깊은 산골까지 찾아온 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때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서 이름 날린 ‘사하이 왕꾸아’(왕꾸아 동지)로 알려진 인물이다. 아무도 없는 그이 집 마당에 앉아 1시간쯤 기다렸다. 승냥이인지 너구리인지 내장까지 말끔히 손질한 짐승을 든 중년 신사가 나타났다. “사향고양이를 이웃이 잡아다 줘서.” 일흔 하나라고 듣고 온 나이와 구리빛 단단한 몸집이 어울리지 않아 주뼛주뼛 이름을 물었다. “사하이 왕꾸아?” “왓꾸아 셀리. 왕꾸아나 왓꾸아나 비슷하니 아무렇게나 불러도 돼.” 직업 탓에 숱한 사람을 만나왔지만 이름을 아무렇게나 불러도 된다는 이는 또 처음이다. 그이 첫 인상은 바위가 웃는 것 같았다. 이름은 들어왔지만 만날 기회가 없었던 터라 마음이 급했다. “아직 공산주의자인가?” 가장 궁금했던 건데, 던져 놓고 보니 첫 질문치고는 너무 나간 느낌이 들었다. 서로 쳐다보며 한참 웃었다. “심장은 공산주의자. 100퍼센트!” “왜?” “예나 이제나 세상이 안 바뀌었으니까.” 결연한 그이 얼굴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정치적 이념과 상관없이 스스로 믿음과 원칙을 지켜온 사람을 볼 때 느낄 수 있는 안정감 같은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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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땅산에 투입한 반공 용병인 국민당 잔당에게 무기를 공수하는 타이군. 친이후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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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내력은?” “무장투쟁 접은 1983년, 라오스 국경 도이파몬 산기슭 반롬화파몬 마을에 살던 우리 몽족이 옮겨와서 세웠지.” “모두가 전선 뛴 사람들인가?” “한 400명쯤 되지. 요즘 360 가구에 주민 수가 3500인데, 1세대는 거의 모두라고 보면 될 듯.” “여기 오기 전에 반후아이한 마을 들렀다 왔는데, 왜 이 지역 사람들이 유독 무장투쟁에 그렇게 많이?” “거기도 친척들이야. 본디 여긴 라오스에서 건너온 몽 사람들이 많은데다 깊은 산속이니 타이 정부나 군인이 마음대로들 했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닥치는 대로 죽였고 돈 될 만 한 건 모조리 쓸어 가버리니 달리 길이 없었던 거야.” 왓꾸아 말은 이 두 마을 뿐 아니라 반촘푸를 비롯해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에 뛰어든 모든 몽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겪었던 일이다. 몽 사람들한테는 애초 정치적 신념이었다기보다 생존을 건 최후·최고 선택지가 바로 타이공산당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타이 정부가 군대로 밀어붙일수록 오히려 타이공산당은 더 큰 동력을 얻었다. 그러니 산악전투 경험이 없던 타이군은 곳곳에서 타이공산당한테 깨지기 시작했고, 결국 타이군은 산악게릴라전에 이골 난 국민당 잔당을 반공 용병으로 투입하게 되었다.
“몽족 사람들 가운데 진짜 공산주의자는 극소수다. 우리가 실수한다면 앞으로 모든 몽족이 공산주의자가 되어 더 큰 문제가 벌어질 것이다. 군 동원은 장기적 관점에서 자멸이 될 것이니 진압작전을 신중하게 하고, 정부는 선전 대신 진실을 말하라.” 1969년 3월, 오죽 했으면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이 나서 왕정을 부정하는 타이공산당에 뛰어든 몽족을 향한 정부의 강경책을 비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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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투쟁에 뛰어든 몽족 게릴라는 저마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지가 타이공산당이었다고 한다. 친이후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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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신은 영혼 팔아먹은 자본가일 뿐”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왓꾸아는 열아홉 되던 1966년 타이공산당에 도장을 찍고 라오스, 베트남, 중국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왔다. 이어 1972년 무장투쟁에 뛰어들어 1981년까지 9년 동안 게릴라 100여명을 거느린 중대장으로 케엣8(공산당 제8구) 산하 치앙라이주와 파야오주의 도이야오, 도이파몬, 푸치화 같은 산악 격전지를 누비며 1000회 웃도는 전투 기록을 세웠다. “그 시절 함께 전선을 뛰었던 동지들은 누군가?” “짜투론 차이생(탁신 친나왓 정부 부총리), 섹산 쁘라서쿤(탐마삿대학 교수), 닥터 웽 또지라깐(레드셔츠 지도자. 정치인)…” 왓꾸아 입에서 1970년대 학생운동 주역으로 공산당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던 이들이 줄줄이 튀어 나왔다. “그 가운데 탁신 쪽으로 간 사람이 적잖은데?” “그이들은 많이 배웠고 가는 길도, 뜻도 다를 수 있으니까. 근데 탁신은 아냐. 그자는 우리 영혼을 팔아먹은 자본가일 뿐이야.” 무장투쟁 전선을 달렸던 이들의 자존심이 탁신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처음 동북부에서 우리 동지들이 걸쳤던 레드셔츠 영혼을 탁신과 몇몇 지도자란 자들이 공짜로 쓸어갔지. 그 다음엔 레드셔츠를 팔아 정치인이 되었고. 그게 장사치들 버릇이야.” 왓꾸아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진짜 레드셔츠는 탁신을 추종하는 자들이 입고 다니는 것과 밑감부터 달라. 오해하면 안 돼! 탁신으로는, 모조품 레드셔츠로는 이 세상을 못 바꿔.” 왓꾸아는 할 말이 많았다는 듯 거침없이 쏟아냈다.
동생 립뽀 셀리를 비롯해 가족과 친척 100여명이 타이공산당 무장투쟁 전선을 달렸던 셀리 가문은 이제 전쟁 없는 마을 반후아이쿠에서 탈 없이 살고 있다. 반후아이쿠를 벗어나 산길을 돌아 나올 때까지 왓꾸아 말이 따라왔다. “타이공산당 무장투쟁은 내 명예다. 다만, 세상을 못 바꿔 후손들한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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