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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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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27)
가족의 고통에 관하여 이현석,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가 들려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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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만연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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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내와 종종 다투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 문제의 원인을 찾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뭐 이런 것 가지고 싸우냐, 하시겠지만 말할 때는 나름 심각하지요. 둘 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대학생, 대학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때 발생한 문제의 원인을 전 사회에서 찾고 아내는 가정에서 찾거든요. 예를 들면, 학생들이 서로 돕지 않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보면 저는 사회가 너무 경쟁적이어서 그렇다고 말하고, 아내는 어릴 때 너무 성적, 성적하면서 커서 그렇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제 견해를 고집해오다가, 최근 생각을 바꿨어요. 꼭 한국 사회에서 가정이 엄청 문제라서 그렇다기보다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에 부여된 지위를 생각해보니 사회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가정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른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현대 사회가 가정에 부여한 역할이 있죠. 양육과 교육, 그것을 사회가 어느 정도 나눌 것이냐는 차이가 있지만,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은 가정이니까요. 보통, 청소년이나 젊은 성인이 물의를 빚었을 때 그의 가정환경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그 방증일 겁니다.
이런 가정을 바라보는 방식, 특히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진 고정관념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며 비판하는 견해가 있죠. 최근에는 이 주제로 책도 나왔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천해서 화제도 되었죠. 김희경 현 여성가족부 차관이 쓴 ‘이상한 정상가족’입니다.[1] 책은 결혼을 통해 이뤄진 부모와 자녀의 4인 가족을 이상적인 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지요. 여기에서 벗어난 가족 형태는 비정상이라 여겨집니다. 예를 들면 동거나 사실혼 관계는 비정상적인 가족으로 여전히 사회 질서에서 배제되지요. 심지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4인 가족은 잘살고 있을까요? 소설과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공격한 것은 남성 일반이라기보다는 남편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와 여성에게 놓인 위계적 차별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 중 하나엔 4인 가족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고정관념이 포함되지요.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일단 사회가 다른 가족 형태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2014년 진선미 의원이 발의한 생활동반자법(또는 2017년 심상정 위원이 공약한 동반자등록법)은 아직 입법되지 않았습니다. 생활동반자법이란 가족을 배우자, 직계혈족, 형제자매로 규정해 동거인을 가족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행 민법 제779조를 보완하는 것으로, 함께 사는 사람을 동반자로 지정합니다. 같이 사는 사람이 꼭 이성일 필요는 없으니, 동성 동거인 또한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요.
이 법을 비난하는 측에선 “동거를 권장하는 결과를 낳으며, 그로 인하여 저출산 문제, 사생아의 양산과 같은 사회 문제가 증가”한다고 주장합니다.[2] 전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우리나라가 뭘 더 염려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사실혼의 법적 권리 보장을 통해 출산율 증가 정책을 폈던 프랑스 사례가 있음을 지적해야겠지요.[3] 하지만, 그 이전에 동거인이 겪는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가장 큰 일로 지목하는 것이 병원에서 동거인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문제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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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1999년 PACS(Pacte civile de solida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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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환자의 보호자는 가족입니다. 보호자가 책임을 지고 법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죠. 동거인은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환자의 보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거인은 가족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보험 정보로 인적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한국에선 이렇게 하기도 쉽지 않지요. 특히, 동성 동거인인 경우 가족의 반대 등으로 따로 사는 경우가 있는데, 한쪽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은 법적 가족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동거인은 멀리서 그저 발만 동동 굴러야 하지요.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동거인이 불쌍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태의 일면만을 본 걸 거예요. 그 뒤에는 가족 간의 갈등, 가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동거의 사회적 위치, 더 나아가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함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의의 마중물로, 의사이자 작가인 이현석의 단편소설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를 소개하려 합니다. 단편 소설은 작품 속 화자의 정직성과 표현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문제로 만드는 것이 이 동성 동거인의 입원 문제와 원래 가족의 정서적 앙금이거든요. 그 조곤조곤한 이야기를 한번 살펴볼까요?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 이시진과 유나의 이야기
서술자는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입니다. 자전 소설인 것처럼 여러 설정이 깔려 있는데, 서두에 “30대 초반의 일개 봉직의임에도 의사 중에는 희귀한 등단작가라 완화의료학회에서 ‘의학과 인문학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요청해온 탓”에 당직을 하는 중 글을 쓰는 모습을 담은 것이 그 예죠.[5] 실제로 의사이면서 등단작가인 사람은 마종기 시인, 이현석 작가 등 극소수이기에 서술자와 작가를 분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은 두 노인의 이야기인데, 두 사람은 “누구라도 먼저 죽을 때가 다가오면 서로의 곁을 지키자고 약속”했어요. 한 사람이 자식을 만나러 갔다가 쓰러지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던 상대는 노인을 찾아 나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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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중앙신인문학상 소설부문을 수상한 이현석 작가. 위 사진은 제18회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자로, 가운데 있는 이가 의사이자 단편 ‘참(站)’으로 등단한 이현석이다. 출처: 중앙일보[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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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자는 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지 못하는데,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병동으로 내려갔다가 유나를 만나 함께 정원으로 나갑니다. 유나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서술자가 쓰던 소설의 주인공인 환자 이시진의 딸입니다. 서술자는 이시진과 딸 유나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어요. 이시진은 50대 초반 남성으로 응급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는데, 수술실 앞에서 고성이 오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환자 가족과 자칭 환자 남동생을 둘러싸고 벌어진 다툼이었고, 남동생이라고 했던 이는 사실 환자의 연인이었어요. 원무과에서 환자 인적사항에 남동생이 없음을 알고 가족에게 연락했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가족이 환자를 찾아와서 환자의 연인을 만나게 된 거지요. 환자는 아내와 딸을 버리고 연인과 함께 떠났던 전력이 있는지라 가족은 그를 곱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서술자가 이들을 보면서 무거움을 느끼는 이유는, 한때 친밀한 사이였던 대학 동기 수연이 이 사연을 각색해 인터넷에 올렸고 그 글이 사회적 논란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수연은 가족을 악마처럼 그렸고, 정치인은 글을 보고 생활동반자법 발의를 외칩니다. 하지만 서술자는 알고 있죠. 가족을 악마라고 볼 수 없음을. 무엇보다 이시진은 아내와 딸을 버렸던 전력이 있습니다. 심지어 아내의 장례식에 찾아오지도 않았던 사람이죠. 그에게 품은 감정의 골을 도외시한 채 그저 환자의 연인을 욕한 가족을 나쁜 사람으로 그린 수연을 보며 서술자는 분노에 휩싸여 전화를 겁니다. 하지만, 서술자의 적의에 찬 비난을 듣던 수연은 서술자에게 쏘아붙이죠. “넌 물어봤니?” 서술자는 과거 문예지에 실은 단편에서 수연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적이 있습니다. 수연 자신을 비난하려면 먼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라는 말이었죠. 그렇기에 사정을 알고 있는 서술자는 수연의 글에서 악마로 그려진 딸 유나에게 미안함을 느껴요.
사망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 이시진을 놓고 유나가 품었을 분노와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서술자는, 환자가 세상을 떠나려 하자 그를 긍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유나가 오히려 어색합니다. 딴생각하다 유나가 외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사랑, 그거 안 하면 안 되나? 그냥 안 하면 되잖아!” 소설은 서술자와 유나가 각자 이서진과 연인의 이야기를 “정원 저편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 나요. 두 사람이 남겨둔 것은 다 마음의 빚이겠지만, 그것을 물들인 감정은 다를 거예요.
고통의 두 층위와 생활동반자법 논의
생활동반자법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논의 위에는, 우리가 가족을 어떻게 구성하고 만들어갈 것인가에 관한 생각이 얹혀 있어요. 이 중 가장 강력한 방식이 서두에 말씀드렸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일 겁니다. 여기에 저항하는 예술작품이 여럿 있었지요. 예컨대, 김태용 감독의 2006년 영화 ‘가족의 탄생’은 이상한 관계로 함께 살게 된 사람들이 새로 ‘가족’이 되어 가는 모습을 환상과 함께 비춰내지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2013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어느 가족’으로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두 영화에서 혈연이 아닌 다른 형태로 묶인 가족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족’이 인간 생활의 기본 구조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요.
가족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일 거예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신탁의 아들 오이디푸스. 이 그리스 고전 비극을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원형으로 끌어들였어요. 라캉은 이것을 구조화하여, 가족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방식으로 다시 정립했지요. 오이디푸스는 법을 상징하는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 또는 어머니가 주었던 원초적 만족감을 욕망하며, 가족의 이름을 내면화하는 과정인 “거세 위협”을 통해 사회화되는 주체를 가리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름을 부여받죠. 그 이름은 그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역할을 합니다. 부모는 그에게 가족 구조를 통해 그 배경에 있는 사회 구조가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자리와 법칙을 수용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죠. 사회학이나 아동심리학의 문학적 판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는 이야기이죠.
하지만, 이 가족의 형태가 꼭 남성인 아버지와 여성인 어머니일 필요는 없습니다. 종손을 키우는 조부모,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를 돌보는 보육자 모두 같은 구조에서 각자의 역할을 맡죠. 누군가는 아이에게 사회의 법을 부여하고, 누군가는 아이에게 근원적 욕망(예컨대, 어머니의 품)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남녀의 혼인을 통해서만 구성될 필요는 없는 것이죠. 재생산 기술이 발전하여 동성 부부가 자녀를 가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 자녀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정상 가족’을 유지하려는 핑계일 뿐이에요.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런 규정과 구조가 어떤 아픔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일 거예요. 예컨대, ‘그들을 정원에 남겨 놓았다’에 등장하는 이서진과 유나의 아픔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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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형태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정상’이라고 여겨진 부부와 미혼자녀 구성의 가족은 점차 줄어들고, 대신 부부, 편부모와 미혼자녀, 기타가 증가하고 있다. 동거인은 가족으로 인정받지 않으므로 현재 통계는 잡히지 않으나, 통계청의 ‘2018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56.4%가 동거를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국가지표체계[7], 통계청[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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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이기에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이서진은 원래 동성애자였을 가능성이 높아요. 양성애자였다면 그가 버리고 떠난 아내의 장례식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을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죠. 그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부정하고 정상 가족을 꾸미고자 했으나, 계속 자신을 속이는 데 실패한 인물입니다. 그는 아내와 딸을 두고 오랫동안 만나온 연인과 함께 떠났어요. 그가 살아온 시간을 강요된 삶과 진짜 삶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둘 중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그가 처한 사회적 현실과 내적 진실이 일치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의 비극적 초상일 뿐이죠.
하지만 그 강요는 다른 사람에게 크나큰 슬픔을 만들어 냅니다. 이서진이 버리고 떠난 딸, 유나는 선택권이 없어요. 이서진의 선택은 자신에게 진실했을지언정 딸은 아버지의 결정을 그저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았고, 유나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질문을 오랫동안 품고 살아갑니다. 그 질문이 닿은 곳은 “사랑, 그거 안 하면 안 되나?”라는 외침이죠. 두 사람 간의 사랑이 그렇게 중요했느냐고, 자신을 향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느냐고 질문할 수밖에 없는 유나를 아프게 만든 것은 일차적으로 이서진입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만든 것은 결국 사회가 아닐까요. 애초에 거짓을 살도록 강요한 주변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마, 생활동반자법에 관한 고민은 이 층위에서 이뤄져야 할 거예요. 그저 무엇이 ‘정상’인가를 생각하는 대신, 어떤 아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고민 말입니다.
두 세계를 사는 의료인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학에 관한 고민으로 이 이야기를 살펴볼까요? 이 모두를 지켜보는 의사인 서술자는 두 연인도, 유나도 모두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는 처음에 소설―그가 쓰고 있던 처음의 소설이자, 이 소설 안에 들어 있는 액자 중 하나―로 두 연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을 만큼 연인에게 동정적입니다. 이서진을 찾던 연인의 안타까움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가 소설을 마무리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유나의 아픔을 아는 또 하나의 자신입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하려는 연인 앞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아니 이해할 수는 있는지 묻는 유나는 연인의 소망을 실현하는 것을 가로막지요. 두 이야기는 모두 의사-서술자 안에서 작동하면서 충돌합니다. 어느 쪽을 우선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요.
이 충돌 구조는 의료인의 균열하는 실존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합니다. 의료인은 두 세계에 살지요. 한쪽은 의과학의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예요. 다른 한쪽은 환자 일상의 불확실하고 온갖 것이 뒤섞인 세계입니다. 의료인은 이 두 세계를 어떻게든 연결해야 해요. 보통 여러 이유에서 일상을 무시하고 의과학으로 그 세계를 대체하는 결정을 내리지만요. 하지만, 이 갈등은 의료인의 삶에 언제나 남아 있습니다. 이미 친구 수연이 생활동반자법을 둘러싼 정치적 의제로 추상화해 버린 연인의 이야기와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유나의 이야기 사이에서 서술자가 고민하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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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평가 수전 손택은 역작 “은유로서의 질병” 서두를 환자가 두 세계에 거주한다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모든 인간은 편안의 왕국과 병의 왕국 두 나라의 시민권을 지니며, 모두는 편안의 왕국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병의 왕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긴다. 이런 ‘두 세계 은유’는 현실과 이데아를 나눈 플라톤부터 시작해 인간 역사 내내 등장하며, 이런 은유의 핵심에는 “두 세계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놓인다. 하지만, 질환 이야기는 두 이야기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대신 두 세계 사이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 의료인은 두 세계 사이 긴장과 충돌 속에서 사는 자다. 출처: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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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두 가지 다른 높이의 고통이 종합되는 공간은 정원입니다. “병원에 딸린 소박한“ 정원은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환자들이 산책하고, 대충 가꿔져 있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공간이죠. 하지만 그곳을 유나의 이야기와 서술자의 고민이 채울 때, 정원은 화해의 장소로 바뀝니다. 저는 여기에서 미래를 엿봅니다.
많은 사람이 현대 의학을 차갑다고 비난합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의료인이 의과학의 세계만을 선택해 왔기 때문일 거예요. 그것은 현대 의학의 발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의학은 자신의 근거를 확립하기 위해 가쁜 발걸음을 디뎌 왔거든요. 아직도 갈 길은 멀고, 치료는 불확실합니다. 의료인은 여기에서 의과학의 확실성을 선택해 온 것이죠. 누군가는 이를 의학 전문직이 권력을 탐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전체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선 오히려 관료주의적 의료 제도를 비난하는 것이 맞겠죠. 사람을 절차로 대체하고 이를 성공으로 말하는 제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불확실성을 선택할 수 있는 장소가 허락된다면, 상황은 좀 더 나아질지도 모르겠어요.
우리의 일상은 두 고민이, 고통이, 슬픔이 만나 화해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진지하게 듣는 사람과 여기에 반응하여 자신을 내보이는 사람이 그곳에서 만나겠지요. 이를 위해선 의료인과 환자가 다시 만나는 일상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존중받을 장소를 꿈꾸는 일이 필요할 거예요.
김준혁/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참고문헌
1.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동아시아; 2018.
2. 동성결혼 합법화와 ‘생활동반자법’. 크리스천투데이 [Internet]. 2018년 1월 14일 [cited at 2019년 12월 27일]. Retrieved from: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8389.
3. 황보연. 동거커플 인정 뒤 출산율 오른 프랑스…한국은 실태도 몰라. 한겨레 [Internet]. 2016년 12월 7일 [cited at 2019년 12월 27일]. Retrieved from: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73584.html.
4.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비혼 동거 커플의 증가와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PACS). 글로벌 사회정책 브리프 2016;13.
5. 이현석. 그들을 정원에 남겨 두었다. 문학3 [전자매체본] 2019;2.
6. [2017 중앙신인문학상] 다음 작품도 일상의 리듬으로 쓰고 싶어. 중앙일보. 2017년 9월 25일 [cited at 2020년 1월 1일]. Retrieved from: https://news.joins.com/article/21966685.
7. 여성가족부 가족정책과. 가족의 형태별 분포. 국가지표체계 e-나라지표. 2017년 1월 20일 [cited at 2020년 1월 1일]. Retrieved from: 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576.
8. 사회통계국 사회통계기획과. 보도자료: 2018년 사회조사 결과 (가족·교육·보건·안전·환경). 통계청. 2018년 11월 5일 [cited at 2020년 1월 1일]. Retrieved from: http://m.kostat.go.kr/board/file_dn.jsp?aSeq=371501&or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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