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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1952~2018)은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소설과 사진, 음악 등 여러 영역의 미적 현상들을 다양한 이론의 도움을 빌려 읽으면서 자본주의 문화와 삶이 갇혀 있는 신화성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일에 오랜 지적 관심을 두었다. 글은 “아침의 피아노” 저자 소개, 사진-차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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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18)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철학자의 투병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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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1952~2018)은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소설과 사진, 음악 등 여러 영역의 미적 현상들을 다양한 이론의 도움을 빌려 읽으면서 자본주의 문화와 삶이 갇혀 있는 신화성을 드러내고 해체하는 일에 오랜 지적 관심을 두었다. 글은 “아침의 피아노” 저자 소개, 사진-차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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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께
일면식도 없는데 이렇게 편지를 올리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선생님께서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바로 했지만 인제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그런 부끄러움 때문이겠지요. 예, 언론을 통해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고, 이후 유고작으로 출간된 “아침의 피아노”를 접했습니다. 제목과 앞부분을 읽고 한동안 더 나가지 못했더랬지요. 쓰지 못하다 인제야 적고 있는 이 편지처럼, 선생님이 남기신 일기를 읽어가는 일 또한 당장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제 소개를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글과 화면으로만 뵈었지 직접 뵌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돌보는 소아치과를 전공한 치과의사입니다. 전문의 끝나고 찬 바람에 머리가 식을 때 즈음, 지금까지 하던 일에 대한 막연한 답답함과 불안감에 철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주변을 맴돌았지요. 이후 의료인문학을, 의료윤리를 공부하고 지금은 이일 저일 하면서 소소하게 글을 적고 있습니다. 글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따뜻하게 만드는 수단이라는 믿음, 익사(溺死)의 순간에 드리워진 가느다란 동아줄 하나 의지하면서요.
평생 이과 공부를 하며 살아온 저에게 철학과 문학은 발길 들이기 어려운 밀림과 같았습니다.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길을 잃기 부지기수였지요. 의사로서 그래도 과학에 대해 조금 안다고 과학철학을 뒤적여 보았지만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논리학에 대한 이해 없이 무턱대고 달려들었던 탓도 있겠지만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요. 무엇보다, 과학철학이 물리학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었지만, 대학 이후로 생물학만 약간 공부하다 의과학에 대한 이해만 얄팍하게 가진 저에겐 잘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따라가 보았지만 제가 궁금해한 질문은 그 속에 없었어요. 저는 환자를 보면서 “어떻게 진료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윤리학을 했으면 된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말씀드린 것처럼 이후에 다시 의료윤리학을 공부하긴 했습니다만, 학생 수준에서(그리고 당시 책에서 접할 수 있던) 의료윤리 문제들은 윤리적 사안에 대한 고민이었지 의료 자체에 대한 고민은 아니었습니다. 네, 저는 의학적 제도 자체가 지닌 내적 한계와 모순을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당시에는 뭐라고 정의할 수 없었지만요.
그 덕에 풀리지 않는 고민을 안고 이런저런 강의와 책을 뒤적이게 된 것이 행운이었을까요. 어느 인문학 강좌 누리집에서 선생님이 강의하신 내용을 만났습니다. 철학자 아도르노, 베냐민, 바르트, 그리고 소설을 다룬 선생님의 강의들 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철학 앞 진입장벽을 넘지 못하고 있던 저에겐 쉽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듣다가 언뜻언뜻 들리는 말들이 있었지요. 이를테면 카프카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그가 소설을 통해 담아낸 것은 ‘죽은 척하기’를 통한 전복이라고, 그는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길 수 없는 적의 힘에 맞서는 대신 죽은 척, 진 척하여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다는 해석 같은 것이요.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철학 ‘읽기’를, 소설 ‘읽기’를 배웠습니다. 그 안에 있는 정보를 캐내는 것이 읽기라고 생각하던 저에게 선생님은 ‘읽는 법’을 가르쳐주셨지요. 선생님이 하신 어느 강좌 제목처럼, 그 읽기는 책 속 ‘봉인된 꿈’을 깨워내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아침의 피아노”를 가르쳐 주신 방법으로 읽습니다. 이 짧은 단상 속에 담겨 있는 꿈을 깨워내 우리 삶 속 의학, 의료를 바꾸려는 작은 소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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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진영의 암투병 일기 “아침의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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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병에 대한 면역력이다. 면역력은 정신력이다. 최고의 정신력은 사랑이다.” (13쪽)
병 소식을 들은 선생님은 면역에 대해 생각하십니다. 면역(免疫), 몸이 아닌 것과 싸워내는 신체의 작용은 신비하지요. 면역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작용에서 시작합니다. 세포는 표면에 이름표 같은 것을 달고 있어서 자신이 전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리지요. 이런 표지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다른 표지를 하는 세포, 바이러스, 물질들을 공격하여 제거하는 복잡다단한 체계를 면역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만 보면 그저 단순한 처리 체계인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작용하는 여러 세포와 단백질이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면역과 관련된 여러 질환을 생각해보면 면역은 나와 나 아닌 것, 즉 철학적 용어로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방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가 외부인을 받아들이고 밀어내는 방식, 스스로 자신 속 문제 있는 부분을 제거하는 방식 등 여러 가지 통찰을 안겨줍니다.
싸워 이기는 면역, 그 방식은 우리가 흔히 정신력이라는 표현을 쓸 때 떠올리는 작용을 닮았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힘들지만 싸워 이겨낼 거야”라고 지지하는 말을 건넬 때, 그것은 그저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리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외부의 압력을, 흐름을, 힘을 마주하여 그것을 받아내기 힘겨운 상황에 부닥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에 우리는 저항합니다. 우리 안에 담겨 있는 힘을 끌어내어 힘에 힘을 맞세우지요. 그 ‘싸움’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지만, 결국 그것은 먹힐 것인가, 먹을 것인가의 격돌입니다. 물리칩니다. 이겨냅니다. 몰려온 압력을, 힘을 정복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정신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들어 있는 것은 투지겠지요. 싸우려는 의지 말입니다.
우리는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서 투지를 강조하곤 합니다. 싸워서 이겨내야지,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야지,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라는 말들. 병마(病魔)라는 적을 물리쳐 이기는 것이 환자의 투지이며, 환자가 잘 싸울 수 있도록 이런저런 전략을 짜서 명령을 내리고 수행하는 것이 의료인의 투지일 것입니다. 싸워서 이겨내고 우리는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대상을, 누군가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라면, ‘최고의 정신력은 사랑’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언뜻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바울이 보낸 편지에 등장하는 문구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처럼 사랑이 지닌 힘이 모든 것을 이겨낼 것이라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자신이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정신력 중 가장 강력한 힘이니 사랑하는 마음이 지닌 힘을 통해서 지금 처한 상황과 싸우겠다는 다짐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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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초기작 ‘과학과 자선’. 그가 15세 때 완성했다고 하는 이 유화에는 병자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의사, 오른쪽에는 수녀가 앉아 있다.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그려진 그림에서 비쩍 마른 여성에게 내민 두 손, ‘의학’과 ‘자선’은 삶의 질곡에 주어지는 도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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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만 생각해도 좋겠지만,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르게 읽게 됩니다. ‘면역력=정신력=사랑’이라는 의미 연쇄는 앞서 찾은 정신력에 대한 이해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면역이라는 생물학적 개념을 떠올리며 막연히 생각하는 의미를 뒤집을 것을 요구합니다. 최고의 면역력은 사랑입니다. 최고의 정신력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면역력이 사랑을, 정신력이 사랑을 따라야 함을 말합니다. 다시, 사랑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닮는다고 하지요. 오래 살며 사랑한 부부가 서로를 닮아간다고 하는 것처럼요. 어렸을 때 그 말은 그저 부부가 생활을 공유하다 보니 생활습관의 영향으로 비슷해진다는 말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몇 년 살아보니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부는 비슷해집니다. 그 전에 나로 꽉 차 있던 자리를 조금 비워 상대방에게 내어 주면서, ‘나’로 가득 차 있던 내가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상대방을 받아들이면서 변해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면서요.
그 변화가 사랑이라면, 질병에 투지를 맞세웠던 우리는 조금 달리 질환을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병을 그저 박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대신, 자리를 조금 내어주고 함께 살아가며 우리 또한 조금 달라져야 하는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춤추듯 병과 대적”하기 위해 “나의 삶”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환자의 정체성”으로 삼으려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그 사랑을 봅니다(79쪽). “생의 근원적 덧없음과 생의 절대적 존재성” 사이, 즉 삶이라는 부조리와 약동하는 생명 사이에서 환자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영토”로 나아간다는 말씀에서 ‘앓으며 삶’을 사랑하려는 선생님을 느낍니다(83쪽). 질병에 걸려 살아가는 삶의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질환(疾患)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씹어봅니다. 질(疾), 앓음에 우리는 환(患), 근심을 느끼지만, 또 근심을 통해서 우리는 달라집니다. “투병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며 “사랑이 그렇듯 병과도 잘 이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셨지요(90쪽). 예, 앓음은 싸움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했지요. 병을 이기고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병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 말씀 뒤에서 의료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는 요청을 읽어냅니다. ‘명령하는 의학’ 대신 ‘돕는 의학’이 되어야 한다는, 그리하여 환자가 새로운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제 의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을요.
아픔의 무게로 삶을 살아낸다는 것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 (230쪽)
많은 사람이 자유를 말합니다. 어떻게든 옭아매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최근 ‘한 번뿐인 인생’을 강조하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는 그런 자유 추구의 한 극단인 것처럼 보입니다. 삶은 더 없으니 남들이 규정한 방식이나 규칙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외침. 그것은 현재의 행복을 중시하는 생활방식과 이어집니다. 미래를 걱정하거나 미래의 삶을 대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그저 눈앞에 있는 것을 좇으면 된다는 생각이 그 뒤에 있겠지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오디세이”의 노장 오디세우스가 맞닥뜨린 세이렌 이야기 같지요.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는 일은 행복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침몰입니다. 자신을 돛대에 묶은 오디세우스는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요. 이런 대비가 의미를 얻기 어려운 사회입니다. 노래를 듣지 말라는 사회의 강압에 대한 반발에서 욜로는 당위성을 얻고, 그렇기에 꼭 생각해봐야 하는 지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을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사람들은 행복을 좇아서만 사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매번 무엇이 그렇게 급했는지 모르지만, 뒤돌아보면 그것은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는 삶 말입니다. 분주함은 행복을 위한 필요악, 또는 당연히 감수해야 할 필수 조건 같이 여깁니다. 그렇게, 바쁨은 당연한 것이 되지요. 하지만 가끔 생각합니다. 분주함을 통한 행복은 환상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요. “파랑새”는 어릴 적부터 나중에 찾아오는 행복은 환상일 뿐이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여전히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선생님의 자유,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 마음을 치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의 자유는 방종과 달리 조용합니다. 그 행복은 머무는 데서 나오지요. 그리고 그 근원은 몸입니다.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물기. 언뜻 생각하면 무척 단순한 일이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만만찮습니다. 사회에 끌려다니고 자발적으로 내 달리던 관성이 남아 끊임없이 몸을 이리저리 밀어내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기에, 조용히 머무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을 말씀하시면서 “시간은 이제 내게 존재 그 자체”라는 선생님의 언급에서 가만히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봅니다(249쪽). 적으신 것처럼, 미래에 대한 걱정 없는 이에게 5년 생존율은 무의미하지요.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것은 지금이 바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추상적 길이”를 벗어나는 순간, 시간이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인 순간이 찾아오지요. 앓음은 시간에 무게를 부여합니다.
앓음이 만들어 낸 무게는 환자를 거칠게 삶에서 베어내지요. 아무렇지 않게 영위하던 이전 삶은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곳에 있습니다. “관념적” 시간에서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 된 삶의 무거움. 5년 생존율은 누구에겐 그저 숫자놀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겐 숫자 하나하나가 뼈를 에이는 고통으로 다가오지요. 그 숫자는 무겁지만 무거움으로 우리를 멈추게 합니다. 앓음의 무거움은 환자를, 우리를 머물게 하는 추가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무게에 매달려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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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로 유명한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아픈 아이’(1986). 어릴 적 누이가 폐결핵으로 사망한 경험을 떠올리며 그린 이 그림은 이미 죽음에 사로잡힌 소녀의 모습과 감히 그 얼굴을 바라보기 어려운 듯한 자세를 취하는 여성의 모습이 극적 대비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더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돌봄이 파국을 맞은 상황에서, 소녀가 오히려 여성을 위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침의 피아노”와 같은 질병 경험을 적은 병지(病誌, pathography)를 읽는 일은 환자가 내민 위안의 손길에 응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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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병은 아니지만 아마도 직업 때문에 얻었을, 만성 근골격계 통증으로 오랫동안 앓아온 저는 아픔의 무게를 조금은 배웠습니다. 때로 너무 아파 어깨를 떼 버리고 싶을 때, 앓음이 저를 조용히 시켰음을 기억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치기를 벗어나게 한 것이 통증이었고, 이 앓음을 조금이나마 다르게 만들려고 애쓰는 이 분투 또한 아픔에서 왔음을 압니다. 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자유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보행을 지켜”내는 것이며(248쪽), “세상과 인생을 너무 열심히 구경”하는 것이겠지요(254쪽). 아픔이 멈추게 만들었기에 환자는 여기 머물러서 구경합니다. 하지만 그 구경은 방관에서 멈추지 않고 참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앓는다는 것 또한 그래야겠지요. 내 아픔으로 남의 아픔을 돕는 일. 그저 운명을 탓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앓음을 경험하는 방식을 좀 더 부드럽게 바꾸어 내는 노력으로 나아가는 일.
화해, 죽음 앞에서 소망하기 위하여
“화해. 다투지 않기.” (271쪽)
일기의 말미에 선생님은 적으셨습니다. 다투지 않는 것. 생과, 몸과 다투지 않는 것. 아무리 사랑하려 해도 삶에는 수많은 투덕거림이 있지요. 몸이 지르는 비명을 참아내는 일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지요. “내 마음은 편안하다”는 무심하면서도 깊은 마지막 글귀에 애써 견디며 읽던 마음이 무너집니다(279쪽). 투병 기간 견디셨을 아픔을 생각하면 먹먹해집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하지만 책이 “존재의 위기에 처한 이들에 조금이나마 성찰과 위안의 독서가 될 수 있”기를 바란 선생님의 마음은 책을 읽은 모두에게 전달되었을 겁니다(282쪽). 삶과 병과 학문과 아픔과 시간과 죽음을 다룬 책은 여럿 있었고 앞으로도 있겠지만, 선생님의 일기를 읽는 일은 제 걸음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삶과 죽음을, 건강과 앓음을, 의료와 사회를, 의료인과 환자를 화해시키려는 생각이 때로 불가능해 보일지언정, 걸어갔던 것 그 자체는 남으리라는 작은 소망을 “아침의 피아노”에서 얻습니다. 그리하여 책을 남겨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강의가, 책이 없었다면 전 아직도 철학과 문학의 미로에서 빙빙 돌고 있었겠지요.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말씀과 글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겐 큰 축복이었습니다.
한번 꼭 뵙고 싶었습니다. 돌아가신 뒤라도 이 마음 띄워 보냄은 제 나름의 인사입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9년 어린이날 지나 따스한 봄바람을 느끼며
김준혁 올림
김준혁/치과의사, 부산대 의료인문학교실 박사과정(의료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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