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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19 17:59 수정 : 2017.11.20 10:46

유하 예르비넨이 지난달 21일 핀란드 쿠리카에 있는 작업실에서 사회보험공사(Kela)에서 받은 기본소득 수급자 선정 편지를 보이고 있다.

세계 첫 중앙정부 차원 기본소득 실험 ③ 핀란드
매달 72만원씩 2년간 지원받는
39살 장기실업자 유하 예르비넨
실업수당 땐 지원 끊길까봐 일 안해
지금은 육아하면서 드럼 제작 사업
“권리 되찾은 듯 뿌듯” 새 창업 고민

유하 예르비넨이 지난달 21일 핀란드 쿠리카에 있는 작업실에서 사회보험공사(Kela)에서 받은 기본소득 수급자 선정 편지를 보이고 있다.
핀란드에 사는 여섯 아이의 아빠 유하 예르비넨(39)은 ‘샤먼 드럼’을 만들어 판다. 종교 의식에 사용될 법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북이다. 그는 10년 전 창문 장식용품 사업을 시작했지만 생각만큼 매출이 나오지 않았다. 벌이가 없어 3년째부터 실업수당을 받게 됐고, 5년 만에 사업을 완전히 접었다.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선 구직 활동을 해야 했다. 정부가 중개해준 청소업체에서도 일해보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업체와 종교단체의 문도 두드려봤지만 번듯한 직장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몇달 전부턴 드럼을 만들어 팔고 있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기본소득 실험 덕분이다. 핀란드 정부는 지난 1월 세계 최초로 중앙정부 차원의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다. 25~58살 장기 실업자 2천명에게 매달 560유로(약 72만6천원)를 조건 없이 주고 있다. 예르비넨을 포함한 2천명은 내년 12월말까지 2년간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이 실험의 배경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여파와 2013년 휴대전화 제조업체 노키아의 몰락이 있었다. 핀란드의 공공부채는 2008년 국내총생산(GDP)의 38%에서 2015년 75%까지 급증했다. 주변국 중 최고 수준인 실업률은 10%까지 치솟았다가 최근 7~8%대를 오가고 있다. 핀란드 통계청 누리집을 보면 지난 9월 기준 15~64살 실업률은 8.0%로 지난해 9월보다 0.3%포인트 상승했다. 정부는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다 기본소득 실험을 떠올렸다. 나아가 2년간의 실험을 통해 기본소득의 ‘노동 유인 효과’를 확인하겠다고 공언했다.

실험은 정부의 철저한 통제 속에 진행되고 있다. 수급자는 비공개다. 실험 참가자의 행동에 영향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다. 수급자가 돈을 어느 곳에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묻지 않는다. 개별적 접촉도 2년간은 하지 않는다. 수급자가 기본소득의 수급 여부를 거부할 권리조차 없다. 장기 출국이나 구속 등 특별한 변화가 아니고선 수급이 중단되는 일도 없다. 핵심은 일을 하든 하지 않든 동일 금액이 주어진다는 데 있다. 정부는 2019년 수급자 2천명의 구직 활동 여부를 시기별로 추적하면서 기본소득이 ‘수급자 스스로 돈을 벌고자 하는 요인이 되는지’ 살펴볼 방침이다. 지난달 21일 예르비넨을 만나기 위해 쿠리카를 찾았다. 헬싱키에서 서북쪽으로 320㎞쯤 떨어진 이곳은 서울의 1.5배가량인 913.5㎢ 면적에 2만1천여명이 사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일자리가 넉넉할 리 없는 곳이다. 예르비넨은 “여섯 아이를 돌보면서 일자리를 찾는 것은 물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도 힘들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도 끊이질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의 말처럼 핀란드 실업수당 체계가 저임금 노동자의 의욕을 저하시킨다는 평가에는 대부분이 동의한다. 예컨대 핀란드에서는 임금이 비교적 낮은 육체노동자의 소득과, 일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실업수당에 차이가 거의 없다. 장기 실업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시장 보조금은 매달 697유로를 기준으로 자녀 수와 소득에 비례해 정해진다.

이렇다 보니 애초부터 일을 포기해버리는 사람이 많다. 예르비넨은 “기본소득을 받기 전엔 일자리를 찾으면서 주저했다. 한달 수입이 300유로를 넘으면 실업수당이 줄기 때문에 그 비슷한 금액을 버느니 차라리 쉬는 편을 택했다”며 “이젠 그런 계산은 하지 않아도 된다. 삶이 자유로워졌다. 시민으로서 권리를 찾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는 지난해 크리스마스께 받은 기본소득 수급자 선정 편지를 보여주면서 “아이들은 이걸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부른다”며 웃었다.

이제 그는 더 자발적으로 창업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다. 예르비넨은 “누군가는 ‘무료쿠폰’이 생기면 게을러지거나 비도덕적 방향으로 사용할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며 “인간에겐 사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정체성이 있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하나에 300~900유로 정도인 예르비넨의 드럼은 한달에 한두 개씩 꼬박 팔려나간다. 핀란드보다는 독일이나 스웨덴, 노르웨이 등지에서 주문이 더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는 숙박공유 서비스 ‘아트 비앤비’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과 음악, 놀이가 결합된 숙소 임대 사업이다.

주문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샤먼 드럼을 들고 있는 예르비넨.
핀란드처럼 ‘복지 천국’으로 불리는 북유럽 국가들이 이번 실험을 주시하고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복지 행정의 효율성이다. 복지 서비스를 기본소득으로 일원화할 경우, 운영비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해보려는 것이다. 또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조건 없이, 현금 소득을, 정기적으로 지급한다는 기본소득의 특징이 자존감 하락, 스트레스 증가 등 기존 복지 혜택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철저히 노동 유인 효과에만 초점을 맞춘 핀란드의 실험에 대해선 우려도 나온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박선미 사무국장은 “핀란드 실험에는 자유나 권리, 정의 같은 기본소득의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0일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사회보험공사 지점에서 한 시민이 업무를 본 뒤 밖으로 나오고 있다.
예르비넨은 이례적으로 자신이 ‘기본소득 수급자’라고 공개한 이유를 “기본소득은 모두가 궁금해하는 다음 세대의 아이디어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수급이 끝나는 2019년이 오는 것이 두렵지 않다.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

다만 핀란드 정부 쪽은 기본소득 실험이 끝난 뒤 전반적인 정책으로 적용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답하기를 주저했다. 미스카 시마나이넨 핀란드 사회보험공사(Kela) 연구원은 “사회 전반에서 기본소득을 ‘권리’라고 느낄 수 있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할 것”이라며 “모두가 원하는 ‘좋은 방법’으로 일하고자 하는 열정을 부여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헬싱키·쿠리카/글·사진 김미나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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