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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3 19:30 수정 : 2019.11.14 02:37

리틀 사이공의 퍼보.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리틀 사이공의 퍼보.

점심 무렵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그날은 연일 이어지는 불면에 쓸데없는 예민함까지 겹쳐 그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로 “먹고 싶은 음식이 없는 날이 가장 우울하다”고 늘 말해왔지만, 그 말이 사실이 될 줄은 몰랐다. ‘무언가를 먹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버티는 하루가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날은 영 길을 잃은 듯 갈피를 잡지 못한다.

무심코 서울 강남 바닥을 돌아다니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목적 없는 허기가 몰려왔고, ‘익숙한 곳에서 늘 먹던 음식을 먹자’는 생각으로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리틀 사이공’으로 향했다.

내 기억으로는 15년 가까이, 늘 똑같은 맛으로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베트남 식당이다. 지금에야 베트남 음식, 타이 음식과 같은 동남아 음식이 흔해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체인점 위주의 베트남 쌀국수 식당이 동남아 음식점의 전부였다. 주머니 가볍던 고등학생 시절부터 신나게 뛰어놀던 대학생 시절을 거쳐, 질풍노도의 20대 시절을 지날 때까지 위로가 됐던 나만의 ‘원조집’인 셈이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는 메뉴판을 보지 않고도 확신할 수 있다. 쇠고기 국물 쌀국수 ‘퍼보’와 베트남 튀김만두 ‘짜조’, 그리고 돼지고기, 새우, 각종 채소를 넣은 달걀 볶음밥 ‘꼼징능주’를 주문했다. 이곳의 쌀국수를 한 번이라도 먹어본 사람은 안다. 하동관 곰탕을 먹는 듯 진하고 깊은 쇠고기 국물의 힘은 그야말로 ‘겨울의 한 수’다. 부쩍 쌀쌀해진 계절, 차가운 바람에 허하던 속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물을 머금는 순간 따뜻해진다. 매운 베트남 고추를 넣어 매콤해진 국물을 마시고, 둥둥 떠 있는 쫀득한 스지를 입에 넣으면 ‘내가 원하는 음식이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나온 짜조 안에는 당면과 돼지고기, 아삭한 채소가 듬뿍 들었다. 새콤달콤한 피시소스가 잔뜩 뿌려진 짜조를 녹진하고 달지 않은 땅콩소스에 푹 찍어 베어 물면 기름기와 돼지고기 육즙이 건조한 입술로, 뜨거운 입안으로 스민다. 따끈해진 속을 달래는 것은 역시 차가운 맥주다. 지금이야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베트남 맥주 ‘사이공’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쌀로 만들어 달큰하고 부드러운 사이공 맥주를 들이켠 뒤 기름진 짜조를 입안으로 밀어 넣고 뜨거운 국물을 마시는 즐거움은 지금 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다.

외식업계만큼이나 뜨고 지는 속도가, 그 인기의 부침이 심한 곳이 또 있을까? 무언가가 ‘뜬다’ 싶으면 어디서나 그 아이템을 낭비하다시피 모방하는 행태가 횡행한다. 음식을 먹는다기보다 소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느 동네에나 터줏대감 같은 식당은 존재한다. 함부로 아무 식당에나 붙일 수 없는 칭호다. 터줏대감이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식당, 내가 편하고 즐거울 수 있는 식당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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