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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12 14:45 수정 : 2019.06.12 20:12

‘청계천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11일 오후 서울 청계천 공구상가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있다. 빈민운동가 최인기씨 제공

‘DJ 납치사건’ 가택연금 때 처음 만난 일본인
“이희호 이사장 별세 소식 충격적이다”

‘청계천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11일 오후 서울 청계천 공구상가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있다. 빈민운동가 최인기씨 제공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충격이네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만난 ‘청계천 빈민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88) 목사는 고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별세 소식을 접하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노무라 목사는 소식을 전한 기자의 말에 무척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사실을 재차 묻기도 했다. 그는 이날부터 열리는 빈민운동가 최인기씨의 사진전 ‘청계천 사람들’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밤 한국에 왔다.

노무라 목사는 1968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청계천 판자촌에서 선교와 빈민 구제활동을 한 인물이다. 당시 청계천 빈민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집 <노무라 리포트>를 펴냈다. 1970년대 고 제정구 의원 등과 함께 빈민운동을 벌였던 노무라 목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2012년에는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사죄의 연주와 헌화를 했고, 2013년에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분향소를 찾기도 했다.

“일본 도쿄에서 납치됐던 김대중씨가 5일 만에 동교동 자택에 돌아와 사실상 가택연금 됐을 때 그를 만나러 갔었어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동교동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죠.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대문 위쪽에 있던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당당하게 들어갔어요. (웃음) 김대중씨가 집에 갇힌 뒤 부부가 처음 만난 일본인이 아마 저였을 겁니다.”

1973년 8월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 당시 이희호 이사장은 남편의 납치 소식에 매일 아침 단식을 하며 무사귀환을 기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흔을 바라보는 노무라 목사는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게 벅찬 듯 어눌한 발음으로 느리게 말을 이어갔지만, 46년 전 일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활동가들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열쇠로 문을 여는 동작을 취하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사회운동가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가 한국을 찾아 2013년 8월7일 오전 서울 대한문 앞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자동차 분향소를 찾아 김정욱 사무국장한테서 설명을 듣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앞서 이날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32차 6·13 정신계승 노점상대회를 둘러본 그는 1970년대 청계천 빈민의 삶과 오늘날 생존권 투쟁을 벌이는 노점상들의 차이점에 대해 “‘박정희 시대’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변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최근 불거진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의 재개발 논란에 대해선 “자본주의 시대에 사람들의 가치가 너무 빠르게 바뀌다 보니 (한국인들이) 부동산에 집착하는 것 같다. 아쉽다”고 밝혔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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