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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6 22:36 수정 : 2018.02.07 00:14

법조계가 본 ‘짜맞추기 판결’ 정리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면죄부를 준 항소심 판결문은 그를 ‘재계의 권력자’에서 정치권력에 희생된 피해자로 둔갑시켰다. 상식을 거스르는 역주행으로, 법원 안팎에선 그동안 쌓아왔던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재판부가 이 부회장 1인을 위해 어떤 끼워맞추기식 논리를 동원했는지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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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영권 승계 청탁 부정

박근혜는 승계문제 몰랐다?…박 “챙겨보라” 지시
이건희 와병으로 승계 절실했는데
‘강요당한 피해자’ 어이없는 판단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정형식)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위해 꺼낸 핵심 카드는 ‘경영권 승계작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깐 것이다.

이런 전제를 만든 이유는 제3자뇌물죄 입증에 필요한 ‘부정한 청탁’의 존재 자체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기 위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항소심 재판부는 부정한 청탁의 근거를 깨트리면서 미르·케이스포츠재단(204억원)과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출연금(16억2800만원)에 무죄를 선고해 이 부회장에게 적용되는 뇌물 액수를 대폭 낮췄다. 이는 집행유예 선고의 기반이 됐다. 만약 1심 재판부가 유죄로 판단했던 영재센터 16억2800만원을 인정하게 되면, 이미 뇌물로 인정된 최씨 소유의 ‘코어스포츠’ 용역대금(36억3000여만원)과 합쳐 50억원을 넘게 된다. 형량이 높아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기준이 50억원이라, 집행유예 선고는 쉽지 않게 된다. 짜맞추기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지점이다.

하지만 ‘승계작업이 없다’는 재판부의 이런 전제 설정은 상식에 반한다. 임기 5년의 선출직 대통령과 국내 최대 재벌 사이에 일방적인 강요와 피해 구도를 상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는 사실상 모르는 사람이 없던 사안이다. 재판에 나온 경제부처 공직자들의 증언으로도 구체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승계가 없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한 법조인도 “이 부회장은 아버지의 와병 이후 신속한 경영권 승계가 필요했고, 대통령도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계열사들의 실적 향상을 위한 현안도 존재했다.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수백억원을 지원한 게 뇌물이나 정경유착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또 재판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승계작업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거나 승계작업을 매개로 승마지원 및 영재센터 지원을 한다는 묵시적 인식과 양해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이를 입증할 ‘안종범 수첩’뿐 아니라 청와대 수석실이 작성한 경영권 승계 관련 보고서도 모두 배척했다. “작성자가 승계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정을 추론해 작성한 의견서”라고 깎아내리고, “보고서만으로 박 전 대통령이 삼성 승계작업을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단정했다. 재판부 논리대로라면 박 전 대통령이 최원영 전 고용복지수석에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에 대해 챙겨보라”고 지시한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뇌물을 준 것은 막강한 권력자의 강요 때문이라면서, 정작 경영승계와 관련한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실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선 모르는 척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심이 재단 출연금의 뇌물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도 나쁜 선례로 남을 수 있다. 한 법조계 인사는 “앞으로 시장이나 도지사가 재단을 만들어 기업에서 수백억 출연금을 받아도 처벌할 수 없다는 얘기”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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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종범 수첩’ 증거 불인정

국정농단 증거인데…안종범 수첩 못 믿겠다?
박근혜 지시 내용도 인정 안해
모르쇠 버티는 자 손 들어줘

법조계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 내용 대부분을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두고도 ‘무리한 판단’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안 전 수석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고 인정한 바 있는 이 업무수첩은 다른 ‘국정농단’ 재판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뒷받침할 증거로 수차례 인정된 바 있다.

재판부가 문제 삼은 대목은 수첩에 적힌 내용의 ‘진실성’(신빙성)이다. 박 전 대통령이나 이 부회장에게 수첩에 적힌 대화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면, 이를 듣고 받아 적었다는 안 전 수석의 기록은 대화나 지시가 있었다는 점을 뒷받침할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단 취지다.

353일 만에 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5일 오후 경기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의왕/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하지만 이는 앞서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은 물론, 비슷한 종류의 업무수첩을 유죄 증거로 활용한 다수의 ‘국정농단’ 재판부와도 다른 판단이다. ‘삼성 뇌물’ 수수자인 최순실씨와 박 전 대통령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재판장 김세윤)는 지난해 12월 장시호씨 등 선고공판에서 이 수첩을 “안 전 수석이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말을 기계적으로 적은 것”이라고 인정했다. 또 수첩에 언급된 돈과 실제 후원액수가 일치하고,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 2015~2016년 면담을 한 당일 수첩에 빙상, 승마 관련 지시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의 단독면담에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대한 후원을 요청했다고 봤다.

이밖에 지난해 11월 서울고법 형사10부(재판장 이재영)도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항소심에서 김성민 전 국민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 위원장 교체에 대한 문 전 장관 진술과 안 전 수석 업무수첩 내용이 일치한다고 보고, 박 전 대통령이 삼성 합병 찬성 지시를 내렸다고 판단했다. 또 박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발언을 기록한 박준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수첩 역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재판에서 김 전 실장 등의 유죄 판단 근거로 활용됐다.

법조계에선 이번 재판부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수첩의 증거능력을 일괄 배제하면서 생길 수 있는 역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형사부의 한 부장판사는 “뇌물공여자와 수수자가 부정청탁을 주고받은 대화 내용에 대해 함구하거나 부인하는 이상, 그 대화 내용을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받아들일 수 없단 논리로, 자백 수준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또다른 판사는 “진술자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는 예외적 상황이나 업무상 필요로 작성된 문서는 통상 증거로 인정하는데, 재판부가 지나치게 엄격히 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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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뇌물액수 낮추려 꼼수

■ 말·차량 사용 뇌물 인정하고도 액수 산정은 안해
“말, 내 것처럼…” 정유라 증언에도
말은 뇌물 아니라고 자의적 해석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판결문에는 ‘정유라 승마지원’을 뇌물로 인정하면서도 뇌물액을 되도록 낮춰주려는 ‘꼼수’도 눈에 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최순실씨 소유의 ‘코어스포츠’에 보낸 용역대금(36억3000여만원)은 뇌물로 인정했지만, 정씨가 탄 마필과 차량, 보험료 등에 대해선 소유권이 ‘삼성전자’에 있기 때문에 뇌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마필과 차량 ‘사용 이익’은 뇌물이라고 판단했으면서도 구체적인 금액은 계산하지 않았다. 사용 이익이 정확히 계산되지 않으면서 이 부회장의 뇌물액은 36억3000만원에 그쳤고, 결과적으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가중 처벌 기준인 50억원도 넘지 않게 됐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물건이 뇌물로 건너갔는데 물건 자체를 뇌물로 보지 않고 사용 이익만 뇌물로 보려면, 받은 사람이 반환할 의사가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삼성과 최순실씨 사이에 반환 약정은 없었다. 법정 증거들로 봐도, 최씨는 반환할 의사가 없었고 삼성은 최씨의 의견을 줄곧 따르던 상태였다.

직접 말을 탄 정유라씨도 반환 의사가 없었음을 뒷받침하는 진술을 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정씨가 승마지원 경위를 모르는 상태에서 한 발언이어서 신빙성이 낮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앞서 정씨는 지난해 검찰과 법정에서 “어머니(최순실)에게 (말) 살시도를 구입하자고 했는데 ‘내 것처럼 타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며 자신은 “삼성에서 사줬다는 취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내 것처럼 타면 된다’라는 말을 ‘내 것은 아니지만 내 것처럼 타면 된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직접 독일까지 가서 정씨가 탈 말을 구입하는 데 관여한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특검 조사 2회 진술에서 “최씨 쪽으로부터 마필을 반환받을 의사가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그러나 이후 이 부회장 변호인단은 이 내용을 배척하기 위해 진술고지권을 고지하지 않은 위법증거라고 주장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참고인 조사에는 진술거부권을 고지할 의무가 없고, 고지 여부와 무관하게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는 특검 쪽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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