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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12 18:17 수정 : 2016.09.12 20:16

홍은전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했다. 복지에 중점을 두었다며 자찬하는 예산안을 들여다보니 중증장애인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지원’ 예산은 오히려 삭감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장애인들이 청와대 앞 종로복지관에서 점거농성을 벌였고 3명이 삭발을 했다. 활동지원이란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중증장애인에게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이다. 이것이 삭감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5년 12월 경남 함안에서 혼자 사는 근육장애인 조아무개씨가 보일러가 터져서 새어 나온 물에 얼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무렵 서울시는 시범운영 중이던 활동보조사업의 예산을 오히려 삭감했다. 많지도 않았던 서비스 시간이 그마저도 반 토막이 나자 장애인들은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라’며 노숙농성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서울시는 ‘한강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고 발표했는데, 그 예산이 무려 7천억이었다. 돈이 없다며 그들이 삭감했던 활동보조 예산은 고작 15억이었다.

분노한 장애인들은 노들섬으로 ‘기어서’ 가는 투쟁을 벌였다. 그날, 작고 뒤틀린 비대칭의 몸들이, 불운과 비극의 상징으로 금기시되고 거부당했던 몸들이 한강대교를 무대로 활짝 펼쳐졌다. 그들은 약한 몸을 드러내어 자선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 그대로를 인정받는 새로운 권리와 정당한 예산을 요구해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으로 서울시는 활동보조서비스의 전면 시행을 약속했고, 이 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2007년 마침내 활동보조서비스는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활동지원제도가 도입되기 전, 중증장애인들은 작은 방안에 유폐된 채 수십년간 살아왔다. 한국 사회를 뒤흔든 민주화의 거대한 물결도, 경제성장의 눈부신 결실도 그들의 방 앞에서 조용히 비껴갔다. 그 방의 문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생면부지의 활동보조인. 그것은 내가 아는 가장 혁명적인 순간이다. 수십년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상이 열렸다는 것, 그것은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방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동네를 구경하고 햇살을 만끽하고 장미꽃을 샀다. 니체를 읽고 연극 무대에 올랐으며 사랑하고 욕망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었다. 활동보조서비스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제도이다.

정부는 이 예산을 지독히도 아까워한다. 서비스 시간을 제한하고 새로운 사람의 진입을 막는다. 그 벽에 가로막혀 장애인 운동 활동가 김주영과 파주에 살던 박지우·박지훈 남매, 꽃동네에서 나와 자립을 준비하던 송국현이 불이 난 집에서 도망치지 못해 죽었고, 근육장애인 오지석이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후 호흡기가 빠지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모두 활동보조서비스를 충분히 받지 못했거나, 신청했지만 거부당했고, 누군가는 아예 신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들은 변덕스럽게 범람하는 강가의 사람들. 작은 파고의 변화에도 삶이 통째로 휩쓸린다. 이 위태로운 삶에도 나름의 긍정적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약하기 때문에, 바로 그 약함을 고리 삼아 강력한 연대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농성에 능하며 전동휠체어를 탄 자신의 몸을 바리케이드 삼는 법을 터득했다. 예산 삭감에 맞서 장애인들은 국회를 향한 투쟁을 예고했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수많은 장애인들의 목숨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유와 평등, 협력과 연대처럼 인류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아름다운 가치 그 자체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참혹한 시대에 여럿이 함께 사회적 몸을 이루는 활동지원제도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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