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평론가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를 봤다. 현대전이 이렇구나, 새삼 놀라게 하는 독특한 전쟁영화였다. 영국, 미국, 케냐, 3국 군이 케냐 상공에 무인 감시 비행기, 속칭 ‘아이 인 더 스카이’를 띄워 놓고 테러리스트 체포 작전을 편다. 지상군을 대기시켜 놓았지만, 손쓸 틈도 없이 테러리스트들이 민병대 자치 지구의 안가로 이동한다. 지상군 투입이 불가능해진 상황. 현지요원을 시켜 딱정벌레 모양의 몰래카메라를 안가로 들여보낸다. 안을 봤더니, 두 명이 자살폭탄테러를 준비한다. 남은 일은 안가로 무인기의 미사일을 날리는 것뿐. 이제 전쟁은 모니터를 보며 버튼을 만지는, 컴퓨터 게임과 똑같다. 현장엔 아무도 없다. 런던 집무실에 모인 군 장성과 각료들(이 작전은 영국군 관할이란다), 하와이 미군 기지의 화상정보 분석팀, 미국 본토 공군기지의 무인감시기 조종팀이 화상회의를 하며 전쟁을 치른다.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상대를 아무 경고 없이 죽이는 게 교전수칙에 맞는지, 미군은 군법무관의 자문을 거친다. 영국 각료들은 더 복잡하다. 전쟁의 윤리까지 들먹이던 끝에 공격 허가가 난다. 남은 건 발사 버튼을 누르는 일뿐. 버튼을 눌러야 할 중위의 눈에, 안가의 담 밑으로 빵을 팔러 온 소녀가 보인다. 대령이 누르라고 명령하는데, 중위가 거부한다. 그 아이가 죽거나 다칠 확률을 줄이도록 목표 지점을 재설정하는 게 가능한지 확인해줄 것을 요구한다. 발사는 지연되고, 폭탄테러 예방과 아이의 목숨을 두고 논란이 오가고, 각료들 사이에서 결정을 위로 미루고 아래로 미루는 일들이 벌어진다. 비겁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비인간적인 전쟁에 그나마 사람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제동장치가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거다. 거기엔 직업윤리도 있을 거고 면피의식도 있을 거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확률과 예측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소신과 면피를 구별할 수 있을까. 내 눈에 띈 건 명령의 상하체계가 분명히 작동하는데도, ‘갑이 시키니 을은 할 뿐입니다’라든가 ‘갑이 시켰으니 을은 책임이 없습니다’ 하는 모습이 없다는 거였다. 거꾸로 위든 아래든 나중에 재판이나 청문회가 열릴 때 자기는 어떻게 될지를 계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후 조사가 직급별로 철저히 이뤄져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거다. 소신이든, 면피든 영화 속 인물들은 상하 간에, ‘갑을’ 간에 공사 구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한국 사회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강하고 의리를 존중해서인지 갑을 간에 공사 구별을 잘 하지 않는다. 또 갑의 불법부당한 일이나 지시를 따르고 돕는 을에 대해 여론의 비난이나 사법처리도 관대한 편이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 때 조현아 부사장의 지시에 따라, 엄연한 최고책임자임에도 비행기를 돌린 기장에게 책임을 묻는 소리가 적었던 게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거꾸로 이런 관대함이 회사와 회사원을 개인 소유물로 여기는 재벌기업 문화의 재생산을 돕고 있는 건 아닐까. 이건희 삼성 회장 성매매 의혹 논란에도, 삼성 임직원 명의로 빌라 전세계약을 맺는 등 회사 차원의 관여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이 회장이 임직원 명의로 수조원대의 차명자산을 보유한 사실이 드러나 임직원들이 줄 서서 사과한 일이 10년도 안 됐다. 이렇게 되풀이된다면 갑뿐 아니라 을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말일 거다. 상하 간에, 갑을 간에 공사 구별을 분명히 하고 불법부당한 지시는 거부하고, 그걸 하지 않은 을에게도 사회가 좀 더 냉정하게 책임을 묻는 쪽으로 문화가 바뀌어가야 하지 않을까.
칼럼 |
[야! 한국 사회] 갑을 간의 공사구별 / 임범 |
대중문화 평론가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를 봤다. 현대전이 이렇구나, 새삼 놀라게 하는 독특한 전쟁영화였다. 영국, 미국, 케냐, 3국 군이 케냐 상공에 무인 감시 비행기, 속칭 ‘아이 인 더 스카이’를 띄워 놓고 테러리스트 체포 작전을 편다. 지상군을 대기시켜 놓았지만, 손쓸 틈도 없이 테러리스트들이 민병대 자치 지구의 안가로 이동한다. 지상군 투입이 불가능해진 상황. 현지요원을 시켜 딱정벌레 모양의 몰래카메라를 안가로 들여보낸다. 안을 봤더니, 두 명이 자살폭탄테러를 준비한다. 남은 일은 안가로 무인기의 미사일을 날리는 것뿐. 이제 전쟁은 모니터를 보며 버튼을 만지는, 컴퓨터 게임과 똑같다. 현장엔 아무도 없다. 런던 집무실에 모인 군 장성과 각료들(이 작전은 영국군 관할이란다), 하와이 미군 기지의 화상정보 분석팀, 미국 본토 공군기지의 무인감시기 조종팀이 화상회의를 하며 전쟁을 치른다.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상대를 아무 경고 없이 죽이는 게 교전수칙에 맞는지, 미군은 군법무관의 자문을 거친다. 영국 각료들은 더 복잡하다. 전쟁의 윤리까지 들먹이던 끝에 공격 허가가 난다. 남은 건 발사 버튼을 누르는 일뿐. 버튼을 눌러야 할 중위의 눈에, 안가의 담 밑으로 빵을 팔러 온 소녀가 보인다. 대령이 누르라고 명령하는데, 중위가 거부한다. 그 아이가 죽거나 다칠 확률을 줄이도록 목표 지점을 재설정하는 게 가능한지 확인해줄 것을 요구한다. 발사는 지연되고, 폭탄테러 예방과 아이의 목숨을 두고 논란이 오가고, 각료들 사이에서 결정을 위로 미루고 아래로 미루는 일들이 벌어진다. 비겁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비인간적인 전쟁에 그나마 사람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제동장치가 있다면 바로 저런 모습일 거다. 거기엔 직업윤리도 있을 거고 면피의식도 있을 거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을 확률과 예측에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소신과 면피를 구별할 수 있을까. 내 눈에 띈 건 명령의 상하체계가 분명히 작동하는데도, ‘갑이 시키니 을은 할 뿐입니다’라든가 ‘갑이 시켰으니 을은 책임이 없습니다’ 하는 모습이 없다는 거였다. 거꾸로 위든 아래든 나중에 재판이나 청문회가 열릴 때 자기는 어떻게 될지를 계산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후 조사가 직급별로 철저히 이뤄져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거다. 소신이든, 면피든 영화 속 인물들은 상하 간에, ‘갑을’ 간에 공사 구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한국 사회는 상명하복의 문화가 강하고 의리를 존중해서인지 갑을 간에 공사 구별을 잘 하지 않는다. 또 갑의 불법부당한 일이나 지시를 따르고 돕는 을에 대해 여론의 비난이나 사법처리도 관대한 편이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 때 조현아 부사장의 지시에 따라, 엄연한 최고책임자임에도 비행기를 돌린 기장에게 책임을 묻는 소리가 적었던 게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거꾸로 이런 관대함이 회사와 회사원을 개인 소유물로 여기는 재벌기업 문화의 재생산을 돕고 있는 건 아닐까. 이건희 삼성 회장 성매매 의혹 논란에도, 삼성 임직원 명의로 빌라 전세계약을 맺는 등 회사 차원의 관여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이 회장이 임직원 명의로 수조원대의 차명자산을 보유한 사실이 드러나 임직원들이 줄 서서 사과한 일이 10년도 안 됐다. 이렇게 되풀이된다면 갑뿐 아니라 을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말일 거다. 상하 간에, 갑을 간에 공사 구별을 분명히 하고 불법부당한 지시는 거부하고, 그걸 하지 않은 을에게도 사회가 좀 더 냉정하게 책임을 묻는 쪽으로 문화가 바뀌어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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