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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31 17:17 수정 : 2016.07.31 21:45

쿠데타 계기로 이슬람권위주의로 치달아
귈렌주의자와 세속주의 군부 동시 숙청

라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9일 수도 앙카라에서 지난 15일 쿠데타 시도 때 부상을 입은 시민을 껴안고 있다. 쿠데타 진압 뒤 에르도안 대통령은 군과 사법부, 언론계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직위해제를 벌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30일에는 기존 군사학교들을 폐교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앙카라/AP 연합뉴스
지난 15일 밤(현지시각)부터 이튿날 새벽 사이에 터키에서 벌어진 군부의 쿠데타 시도는 군·경과 민간인 290여명의 목숨만 앗아간 채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계기로 터키는 건국 이래 100년 가까이 부침을 거듭하던 사회적 갈등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중대한 갈림길로 들어서고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2)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이슬람 보수주의 세력 대 군부·사법·교육 엘리트가 주축인 민족주의 성향의 세속주의 세력의 대립이다. 그리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30일 군과 정보기관을 대통령 직속으로 하는 내용의 헌법개정을 시사했다. 사실상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려는 개헌 시도로 풀이된다.

■ 쿠데타 실패는 민주주의 승리?

이번 쿠데타가 불발에 그친 것은 진압군의 물리력보다는 쿠데타에 대한 터키 국민의 냉대와 저항이 더 결정적이었다. 마침 지방에서 휴가중이던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밤 트위터로 “터키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러 거리로 나오라”는 긴박한 메시지를 띄웠다. 시민들은 맨몸으로 쿠데타군의 탱크 앞을 막아섰고, 군인들을 에워싸며 거세게 항의했다. 에르도안은 쿠데타 진압 직후 연설에서 “터키에 반역 행위를 한 자들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한 경고를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터키 내무부는 27일 현재 1700여명의 군인들을 강제전역시키고, 1만5000명을 쿠데타 연루 혐의로 체포해 조사했으며, 그 중 최소 8000명은 지금도 구금 중이라고 발표했다. 군복을 벗은 장군의 수도 터키 전체 장성 358명의 절반 가까이에 이르러 군 지휘체계에 구멍이 생겼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얼핏 보면 이번 쿠데타 실패는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후 벌어지는 사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실패한 쿠데타가 온 나라에 메가톤급 후폭풍을 불러오고, 이전의 독재 논란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 정치’의 그림자도 짙어진다. 에르도안은 또 사법부, 관료, 대학 등 엘리트 집단에서 거의 5만명을 ‘쿠데타 배후 세력 지지’ 구실로 내쫓았다. 이어 의회에서 국가비상사태를 통과시키고, 사형제 부활을 검토하고, 신문·방송 등 언론사 130여 곳을 폐쇄하기로 했으며, 내각중심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개헌을 추진할 태세다. 에르도안이 절대권력을 쥔 ‘현대판 술탄’이 되어간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이번 쿠데타 시도와 에르도안의 급격한 권력 강화 배경에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뿌리깊은 갈등이 깔려 있다. 터키는 오스만튀르크 제국(1299~1923)의 후예다.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부 튀르크족의 소왕국에서 시작된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600년 넘게 존속한 제국이었다. 전성기에는 사하라 사막 북아프리카와 중동, 이란까지를 판도로 한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오스트리아 등 추축국 편에 섰다가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에 패해 영토의 대부분을 잃고 사실상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케말 파샤)가 주도한 군부가 이끈 독립전쟁 끝에 1923년 ‘터키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 이슬람 보수주의 대 서구식 세속주의

서구식 근대화를 꿈꾼 아타튀르크는 터키 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헌법에 철저한 정교분리를 천명하고 세속주의 국가임을 분명히 했다. 정치지도자 술탄제 폐지(1922년)와 종교지도자 칼리프제 폐지(1924년), 복식 개혁, 여성교육권 보장, 이슬람력 폐지(1925년), 일부일처제 확립(1926년), 터키어 표기를 아랍 문자에서 로마자로 대체(1928년), 여성 선거권 부여(1930년) 등 근대적 개혁 조처가 숨가쁘게 이어졌다.

급격한 세속주의 개혁은 오스만 제국 이전부터 1000년 이상 지속된 이슬람 문화 및 샤리아(이슬람 율법) 전통과 충돌했다. 실은 오스만 제국도 상당히 유럽지향적이고 세속화된 국가였다. 이는 터키가 아랍권이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에 자리잡은 지정학적 요인과 역사와 관련이 깊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이 바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옛 비잔티움)이었다. 오스만의 술탄들도 로마 황제를 자칭했다.

서구화의 세례 속에 교육 받고 성장한 케말과 건국 엘리트들은 근대국가 수립의 핵심 가치로 더욱 급진적인 세속주의를 택했다. 이런 정교분리 원칙은 프랑스의 ‘라이시테(정교 분리)’ 모델에서 가져온 것으로, 공공생활에서 일체의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고 국가 주도형 사회변혁을 추구했다. 군부와 사법부는 터키의 정교분리와 세속주의를 지키는 양대 보루였다.

이런 세속주의 개혁은 근대식 교육을 받은 이스탄불 등 대도시 중산층과 신흥 엘리트 집단에게 혜택이 집중된 반면, 이슬람 전통이 강한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부 및 내륙 지역의 소도시와 농촌 대다수 서민들에겐 이질감을 키웠다. 건국 세력이 정치·사회적 통합을 위해 이슬람을 활용하는 동시에 세속주의 원칙으로 이슬람을 배제한 자체 모순도 갈등의 씨앗이 됐다.

사회·경제적 소외계층이 늘고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상당수 서민 대중은 이슬람주의에 더 끌렸다. 이때 이슬람주의는 종교적 신앙심과 전통의 가치를 일상생활 규범에 적용하자는 것으로, 교조적 신념으로 무장투쟁과 테러도 불사하는 지하드주의 등 이슬람 극단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공식적으론 세속주의 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이슬람 보수주의 집단의 욕망을 기반으로 성장한 정치인이다.

에르도안은 1994년 이슬람정당 복지당의 후보로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해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1998년 헌법재판소가 복지당을 ‘세속주의 원칙 위협’을 이유로 해산해버렸다, 이듬해 에르도안은 공공장소에서 이슬람주의 시를 낭송한 ‘폭력 선동’ 혐의로 4개월 옥살이를 하고 시장직을 박탈당했다. 2001년에는 사실상 복지당 후신인 미덕당도 헌재의 ‘불법’ 판정으로 해산됐다. 이슬람주의 보수세력은 부글부글 끓었다.

에르도안은 2001년 온건 이슬람주의 성향 정의개발당을 창당한 지 1년만인 2002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며 총리에 올랐다. 취임 일성이 “군부에 대한 시민의 우위”였다. 문민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운 군부 견제였다. 이어 2007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뒤 2014년 8월 터키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에 당선되며 지금까지 14년째 최고 실력자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에르도안 집권 시기 평균 경제성장률이 4.5%로 경제성과를 낸 것도 서민층의 탄탄한 지지 확보의 기반이 됐다.

■ 에르도안의 권력 다지기

에르도안은 정계 진출 이후 몇차례 이슬람주의로 비칠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려다 세속주의 보루의 사법부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2008년 대학 캠퍼스에서 여성의 히잡 착용을 금지한 법을 완화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헌법재판소가 세속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개정법을 무효화한 게 대표적이다. ‘무슬림 여성에 대한 역차별 금지’와 ‘종교의 자유’라는 논리도 세속주의라는 대원칙을 뛰어넘지 못했다. 알콜 금지구역 설정과 간통법 제정 같은 시도도 이슬람 보수주의 지지자들에겐 찬사를, 세속주의자들에겐 비판을 받았다.

에르도안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2002년 실세 총리가 된 뒤, 이전까지 세속주의 세력이 장악해온 군부와 사법 엘리트들을 꾸준히 견제하며 물갈이를 하고 세력을 다져갔다. 2007년 첫 고비가 왔다. 정의당 창당 동지이자 직전까지 외무장관을 지낸 압둘라 굴이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됐는데, 군부가 그의 이슬람주의 활동 경력을 문제삼고 나섰다. 헌법재판소는 아예 의회 투표 정족수 미달을 이유로 굴의 대통령 선출을 무효화해버렸다. 그러자 에르도안은 그해 조기총선이라는 카드를 꺼내 압승을 거두고 3선 총리에 오르면서 반대파들의 기를 꺾고 군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에르도안의 집권과 권력 강화에는 펫훌라흐 귈렌으로 상징되는 온건개혁적 이슬람주의 세력에 힘입었다. 귈렌은 이슬람주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적 개혁과 사회참여 운동으로 터키뿐 아니라 이슬람 전역에 학교, 언론, 병원 등 광범히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했다. 귈렌의 추종자들은 군부와 사법부에 광범히 하게 자리잡으며, 이슬람주의를 반대하는 우파적 세속주의 세력을 견제하고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에르도안과 귈렌의 동맹은 2013년 에르도안 정부의 대대적인 부패스캔들로 와해됐다. 에르도안은 이 부패스캔들 폭로의 배후에 귈렌이 있다고 비난하며, 탄압에 들어갔다. 이전 정부에서 탄압을 피해 1999년부터 미국에서 지낸 귈렌은 이때부터 사실상 망명 상태로 들어갔다. 에르도안과 귈렌의 갈등은 에르도안이 이슬람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워 사실상 권위주의 독재로 흘러가면서 발생한 권력투쟁이라 할 수 있다. 에르도안은 군 고위장교들이 상당수 포함된 반란 모의를 적발하면서 군부 엘리트에 대한 우위를 굳히고 집권당의 대규모 부패 스캔들에서 벗어났다.

반면, 케말 아타튀르크가 창당해 1945년까지 일당제 정치에서 터키 공화국의 토대를 닦았던 공화인민당은 2000년대 에르도안의 시대 이후 지금까지 이렇다할 존재감이 없이 무력한 야당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한동안 터키 정국은 군부마저 장악한 에르도안의 권위주의 칼바람이 지속될 전망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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